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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설

이규보 l 디앤피니티

경설
  • 출간일

    2013.05.05
  • 파일포맷

    ePub
  • 용량

  • 지원기기

    PC, Android, iOS
  • 대출현황

    보유5, 대출0, 예약중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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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자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 권21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먼지가 끼어 흐린 거울을 가지고 보는 거사(居士)에게 객이 그 까닭을 물었다. 거사는 “거울이 맑으면 잘생긴 사람은 기뻐하지만 못생긴 사람은 꺼린다. 그러나 잘생긴 사람은 적고 못생긴 사람은 많다. 만일 못생긴 사람이 거울을 들여다보면 거울을 깨뜨릴 것이니, 차라리 먼지 끼어 희미한 것이 더 낫다. 먼지로 흐려진 것은 거울의 표면뿐이지 본래의 맑음이 흐려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잘생긴 사람을 만난다면 그때 맑게 닦여도 늦지는 않을 것이다. 옛날에 거울을 대하는 사람은 그 맑은 것을 취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내가 거울을 대함은 그 희미한 것을 취하고자 함이다.”라고 답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설의 양식이 추구하는 바 참신한 시각과 설득력을 발휘하여, 세상에서 사물과 인간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배척되는가를 말하며,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의 작가 나름의 처세훈을 말해주고 있다.
고려 중기의 대문호. 자는 춘경(春卿).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 지헌(止軒)?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 초명은 인저(仁?)라고 했다가 규보(奎報)로 고쳤다. 지금의 여주(驪州)인 황려현(黃驪縣) 태생으로 그의 일가(一家)는 그 곳의 재향지주(在鄕地主)였다. 아버지 윤수(允綏)는 개성에서 호부낭중(戶部郎中)까지 이르는 관리 생활을 했으므로 소년 시절(8~16세)을 당시의 수도인 개성에서 보냈다. 9세에 이미 신동(神童)으로 널리 소문이 났지만, 소년시절부터 지나치게 술을 좋아하고 방종한 생활을 하여 과거시험을 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과거시험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시 짓기만 일삼아 세 번이나 사마시(司馬試)에 실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불운이 오히려 그의 문학을 위해서는 좋은 계기가 되었으니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작품들 이를테면 <동명왕편 東明王篇>?<개원천보영사시 開元天寶詠史詩>?<화삼백운시 和三百韻詩>와, 2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천마산(天摩山)에 우거하며 지은 <백운거사어록 白雲居士語錄>, <백운거사전 白雲居士傳> 등이 모두 이 시기에 지어졌다. 술과 시작(詩作)에 몰두하다가 22세 되던 해 봄에 이르러서야 사마시에 첫째로 뽑히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노극청전 盧克淸傳>과 <경설 鏡說>도 지었다. <노극청전 盧克淸傳>은 고려시대 한문 전(傳)의 하나로, 특이한 소재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주인공 노극청이 경사로 출타한 사이에 그의 부인이, 살던 집을 상관 되는 현덕수에게 매매했는데 판매한 집의 가격문제로 두 사람의 의견이 대립되었다. 집의 매매가격이 노극청이 그 집을 샀을 때의 값보다 비싸게 현덕수에게 매매하여 시비(是非)가 되었던 것이다. 곧 노극청은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 해도 고마운데 자기가 샀을 때의 값보다 더 비싸게 판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 차액을 현덕수에게 돌려주었고, 현덕수는 현덕수대로 이미 매매가 이루어진 이상 돌려받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주장하며 그대로 이행하자고 하였다. 두 사람간의 팽팽한 대결로 매매가 무효로 될 뻔하였으나 결국 두 사람은 차액을 불사(佛寺)에 시주하는 것으로 합의하는 것으로 작품의 결말이 이루어지고 있다. <경설 鏡說>은 거사(居士)와 손[客]의 대화체로 엮어져 있다. 먼지 낀 거울에 자신을 비추고 있는 거사를 본 손[客]이 거울에 먼지가 낀 것을 나무라는 내용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맑은 거울도 중요하지만 먼지 낀 흐린 거울이 세상에는 더 많을 뿐만 아니라 더러는 먼지 낀 거울에 담긴 모습이 더 필요하다는 말로 손[客]의 동의를 얻는다. 이 시기에 <천엽유화시 千葉榴花詩>를 지어 문장가로서의 인정을 받았고 <남행월일기 南行月日記>와 같은 기행문, 시(詩), 편지 등을 저작하기도 했다. 이규보는 많은 사람들의 천거로 직한림원에 보임되면서부터 벼슬길에 올라 최씨 정권의 비호를 받으며 출세가도(出世街道)를 달렸는데 66세에 드디어 상서(尙書) 벼슬까지 이르렀다. 이 당시에도 국가적 필요에 의해 지은 글이 많은데 서장(書狀), 표장(表狀), 교서(敎書), 비답(批答), 조서(詔書) 등으로 이러한 문장 속에는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말년에는 74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대부분 시작(詩作)에 소일하였다. 이규보의 관직생활을 정리하면 1199년 전주목사록 겸 장서기(全州牧司錄兼掌書記)가 되었고, 1202년 병마녹사 겸수제(兵馬錄事兼修製)를 거쳐 1207년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이어 천우위 녹사 참군사(千牛衛錄事參軍事), 사재승(司宰丞) 우정언 지제고(右正言知制誥)를 거쳐, 1219년(고종 6) 좌사간(左司諫)에 이르렀다. 그 뒤 지방관의 죄를 묵인한 일 때문에 계양도호부 부사(桂陽都護府副使)로 좌천당했다가 1220년 예부 낭중 기거주 지제고(禮部郎中起居注知制誥)에 승진, 국자좨주(國子祭酒)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를 거쳐 1230년 판위위시사(判衛尉侍事)가 되었는데 팔관회(八關會)의 행사에 잘못을 저질러 한때 위도(?島)에 유배되기도 했다. 1232년 판비서성사 보문각 학사 경성부 우첨사 지제고(判秘書省事寶文閣學士慶成府右詹事知制誥)에 올랐다. 이듬해 지문하성사 호부상서 집현전 대학사 판예부사(知門下省事戶部尙書集賢殿大學士判禮部事)가 되었으며, 1237년 금자광록대부 수대보 문하시랑 평장사 수문전 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로 치사(致仕)하였다. 이규보를 무인정권에 협조한 문인이라 하여 권력에 아부한 문인이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그는 뚜렷한 국가관을 지녔으며, 민족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고, 또 외적에 대한 항거 정신이 높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민족서사시인 <동명왕편 東明王篇>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문학은 자유 분방하며 웅장한 것이 특징이다. 시에 있어서, 그는 이인로(李仁老) 계열의 문사들이 대개 형식미에 치중하고 있는 데 반해, 기골(氣骨)?의격(意格)을 강조하고 있으며 신의(新意)와 창의(創意)를 높이 사고 있다. 그는 당송 고문(唐宋古文)의 전통을 이으려 애썼지만, 그의 산문은 고문이 주는 구속에 사로잡히지 않고 자유스럽게 의사를 표현하고 있다. 문집으로 ≪동국이상국집 東國李相國集≫이 전한다. 시호는 문순(文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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